천만원

2 분 소요

2021.04.12

우스갯소리로 맨날 아빠한테 했던 소리가 있다.
‘나 천만원만 줘요~~ 진짜 투자좀 시드있게 해보게~’
‘천만원 아들 주고 맘대로 해보라고 해보는게 진짜 인생경험이라니까???’ 그럴때마다 우리 아빠는 넌 돈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안다. 직접 벌어봐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했다.
이상하게 나는 천만원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이 블로그에 한번 쓴적도 있듯이 뭔가 지금 나이에는 천만원이 있으면 모든게 해결될 것 같은 그런 기분, 마치 최저시급 만원마냥 근거도 없고 논리도 없지만 왠지 그 쯤은 있어야하지않나~ 했던 생각들. 마치 천만원이 있으면 나의 경제적인 자유가 확보될듯한 꿈같은 이야기… 주식이나 비트코인 할때도 항상 입버릇 처럼 천만원은 벌어야지~ 를 달고 살았다.

근데 갑자기 덜컥 천만원이 생겨버렸다.
아빠는 어릴때부터 그랬다.

내가 뭘 말하면 그에대해 잔소리를 겁나게 하시고는,
이내 나를 믿고 항상 그대로 하게 해주셨다.
컴퓨터 사달라 했을때도 그랬고, 핸드폰 사달라 할때도 그랬고, 휴학한다고 했을때도 그랬고, 집팔리게 청소 빡세게 하면 백만원 준다고 했을때도 집팔렸는데 바로 안주고 잔소리 겁나게 하고 줬다. 맨날 어차피 줄거면서 왜 이렇게 잔소리를 하고 주는지 싶었는데,
천만원도 줄줄이야…

오랜만에 아빠의 눈물을 봤다.
살면서 아빠가 우시는 모습을 본게 손에 꼽는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아들들이 아빠의 눈물을 볼 일은 흔치 않을테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태어나서 두번째 눈물이다.
첫번째는 4년전 집앞 꼬치집에서 나한테 이혼을 말하시며 미안하다고 하셨을 때인데, 난 아직도 그때 그 꼬치집에서의 순간이 마음 한켠에 남아 아리게 남아있다.

아빠는 내가 어릴때부터 투자에 관심이 많으셨다.
주식부터 부동산까지 모든 투자를 항상 해오셨고, 부동산은 관련학과로 새로 공부하여 대학교까지 졸업하셨다.
항상 공무원의 대출의 유리한점을 이용해 부동산을 구매해오셨고, 주식도 꾸준히 매매하며 재산을 불렸다.
돈에 대해서 항상 잔소리하시고, 아끼고 사셔서 누가보면 구두쇠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돈을 아끼신 적이 없었다. 용돈은 항상 또래 이상의 수준이었고, 난 태어나서 내가 원한걸
못가져본적이 한번도 없다. 악기를 한달마다 때려쳐도 새로운 악기를 원하면 항상 사다주셨고, 배우고 싶은게 있으면 항상 다 시켜주셨다. 성인이 되서도 올림픽 보고 삘받아서 유도 배우고 싶다니까 유도도 시켜줬다.

가족들 하고싶은건 다 해주시고는, 자기쓸돈은 아껴서 악착같이 투자하셨다.
그렇게 모으고 레버리지를 땡겨서 투자한 돈은 경제상승의 기류를 타고 흐르고 흘러 점점 몸집이 불어났고,
중간에 이혼으로 인해 주춤하기도 했지만, 불어난 돈은 아파트를 두채나 구매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얼마 전, 크게 오른 아파트를 처분하고 레버리지를 전부 청산했다.
(물론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반강제로 처분하긴 했지만.) 아파트가 팔리고,모든 빚이 없어진 날,
아빠는 내가 해준 안주와 소주 한병으로 그 날을 자축하셨다. 25년 가까이 하신 투자가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어제는 할아버지가 백신을 맞으셔서 경과도 지켜보고, 이사온 집도 구경할 겸
새로 이사온집에 오셔서 주무시고 가셨다. 오랜만에 3부자가 아라뱃길 나들이를 좀하고, 점심을 어죽을 먹었다. 저녁엔 회와 소고기를 먹으며 아빠와 할아버지는 소주한잔을 하시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리고 다음날,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천만원짜리 수표를 주셨다. 새차 사는데 보태라시면서…
아빠는 그 천만원을 보고 생각이 많아지셨는지 눈물을 보이셨고, 난 태어나서 두번째로 아빠의 눈물을 봤다.
아빠는 그 돈을 새차에 보태지 않으셨다.

내가 농담처럼 하던 말을 맘에 담아두셨던걸까. 그 수표를 나에게 건네셨다.
너가 쓰고싶은데 쓰라고, 너의 미래를 위해서 쓰라고, 그렇게 천만원이 덜컥 생겨버렸다.
막상 천만원이 생기니 경제적 자유같은건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이 돈을 어떻게 불려야 할까. 어떻게 내 미래를 위해 사용해야할까.

난 태어나서 통장에 200위로는 모아본적이 없는데, 이렇게 덜컥 큰돈이 생겨도 될까.
사람은 돈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있어서, 그 그릇이 커지지 않으면
아무리 큰돈이 들어와도 그 그릇이상은 탕진하게 된다고, 그래서 로또 당첨자들의 대부분은 그 그릇에 넘치는 돈을 탕진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 그릇은 과연 천만원을 담을만한 그릇일까?

그릇이 작으면 어거지라도 키워서 담아야지. 이게 어떤돈인데. 이 돈은 세상에서 제일 값지게 쓸거다.

댓글남기기